일주일 전, 로이 테일러 AMD 상무(Corporate Vice President)의 트위터에 빨간색 PC의 사진이 올려졌고 이내 해당 트윗은 '모습을 드러낸 제미니'라는 제하로 전 세계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그로부터 한달여 전인 1월 28일로 시간을 돌려 보면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VR 엑스포에서 로이 테일러 상무가 초청연사 격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으며 바로 여기서 그 빨간색 PC, 팔콘 노스웨스트사의 완제품 데스크탑 컴퓨터 '티키'가 공개되었다.
발표를 통해 테일러는 티키의 내부에 "가장 강력한" 듀얼 GPU 그래픽카드가 탑재되며 그 연산량의 총합이 12 테라플롭스에 이를 것이라는 점을 함께 밝혔고 시기상 티키에 탑재되는 그래픽카드가 코드네임 제미니, 즉 라데온 R9 Fury X2일 것이라는 점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말하자면 이때 로이 테일러의 손짓으로 소개된 '티키'라는 생소한 이름은 라데온 R9 Fury X2의 분신과도 같은 명사로 각인되었고, 그 상징색과도 같은 빨간 PC가 한달 뒤 로이 테일러의 타임라인에 등장했을 때, 마침 사람들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각도로 살짝 비친 그래픽카드에 '제미니의 첫 모습' 류의 타이틀이 붙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이 사진 속의 그래픽카드는 '제미니'와 동격이 되어 갔다.
(출처 : VRLA Winter Expo Keynote)
(출처 : Roy Talor's Twitter timeline)
이러한 일련의 보도를 지켜보며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 싹튼 것은 놀랍게도 불편함이었다. 불편함은 가장 기본적인 명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저것이 반드시 제미니여야만 하는 필연적인 근거가 있는가. 필자가 수집할 수 있던 정보의 최전선에서는 적어도 저 빨간 상자 안에 담긴 그래픽카드가 무엇이라는 사실만큼은 여백으로 남아 있었다. 존재하는 정보의 조각만으로 여백을 채우자면 필연적으로 논리의 비약을 수반해야 한다. 어디서 비약이 일어났는지 간단히 짚어보자.
우선 로이 테일러의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이 라데온 R9 Fury X2의 그것이 맞기 위한 조건은 의외로 단순하다. "VRLA에서 발표한 바로 그 제품일 것". 현재까지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이나 정황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VRLA에서 티키의 제조사로 거명된 '팔콘 노스웨스트'라는 회사가 재차 로이 테일러의 타임라인에서도 거명되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리 논리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심정적으로 강렬한 동일성을 암시하게끔 유도된 PC의 색상, 빨간색 되시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팔콘 노스웨스트는 AMD가 '티키'의 생산만을 위해 섭외한 일회용 제조사가 아니며, 그들이 이미 시판 중인 '티키'라는 다른 라인업 역시 현존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라데온 R9 Fury X2를 탑재한 완제품 PC'와 동의어쯤으로 사용되던 '티키'의 용례는 여기서 더 이상 맞지 않는다. 외려 AMD가 의뢰한 특수한 사양의 '티키'가 수많은 '티키'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 맞는 것이다. 심지어 팔콘 노스웨스트는 인텔 CPU와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로 구성된 '티키' 역시 정식 라인업으로 출시해 둔 상태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로이 테일러가 '티키'의 사진을 찍어 올렸단 것만으로 거기에 제미니가 탑재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는 없다. 최소한, 단수 아닌 복수의 티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출처 : Falcon Northwest's Twitter timeline)
티키가 '단일한' 하나의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로이 테일러의 타임라인에 올라온 사진들 역시 조금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놀랍도록 편향된 시각에서 -사진에 등장한 '티키'가 '그 티키'이리라는- AMD 임원의 트윗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랬기에 우리의 머릿속에서 상정 가능한 단 하나의 그래픽카드가 '제미니' 였을 따름이다. '그 티키'가 '그 티키'가 아닌 것을 인정하면 거기 사용된 그래픽카드 역시 반드시 제미니일 이유가 없다. 이쯤에서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정작 로이 테일러의 타임라인에는 어떤 형태로든, 해당 PC에 탑재된 그래픽카드가 제미니일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없다는 점이다. Fury, Fiji, HBM, 듀얼 GPU 등 어떤 키워드도 없다. 대신 모든 포스팅을 관통하는 공통된 구절이 있긴 한데, 바로 이것이다 : "Best developer box for VR and DX12"
현 시점에서 VR도, 다이렉트X 12도 모두 미래적이기로는 매한가지인 기술인 까닭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연상작용을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으로 편향시킨 감이 있다. 그러나 엄연히, VR과 다이렉트X 12 모두 '현존하는' 그래픽카드로 구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엔비디아뿐 아니라 AMD 역시 현 세대에 이들을 지원하는 솔루션이 분명 존재한다. 이쯤에서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아래의 사진을 보자. VideoCardz는 해당 사진을 바탕으로 "제미니가 R9 390 시리즈 레퍼런스 스타일의 쿨러를 탑재할 것"이라 전한 바 있었다.
그럴싸해 보인다. 위 사진에 나타난 하와이의 날렵한 몸매를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다른 사진을 한 장 보자. 필자 역시 실물을 본 바 있는 듀얼 Fiji 탑재 그래픽카드, 즉 제미니의 기판 사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자의 무의식적인 불편함을 촉발했던 것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PCI-Express 슬롯과의 비례관계를 통해 여러분도 느끼듯 제미니는 하와이보다 상당히 짧은 기판을 가졌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R9 390 시리즈 스타일의' 쿨러를 달 수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엔비디아가 이미 선보였고 AMD도 R9 Fury에 적용했듯 쿨러가 기판 길이를 초과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병은 의외로 다른 곳에 숨어 있다. 바로 제미니 기판의 '종횡비', 즉 세로 길이가 상당히 길어졌다는 사실이다. 한 눈에 보더라도 제미니의 기판은 R9 390X의 그것보다 훨씬 정사각형에 가까워져 있다. 기실 세로 길이만으로 따지면 오히려 하와이보다 더 높기까지 하다. 이것을 기준으로 R9 390 시리즈 레퍼런스 쿨러의 종횡비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쿨러의 가로 길이는 30cm를 훌쩍 넘게 된다. 그럴듯하지 않다. 티키의 중요한 설계철학 중 하나가 '소형화'임을 상기하자.
또한 우리에게는 'R9 390 시리즈 스타일의 쿨러'가 제미니에 탑재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시사하는 정황증거도 있다. 실제로 제미니의 완성품을 열람한 복수의 해외 매체에서(이들은 NDA에 묶여 현 상황에 관해 정확한 코멘트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 외관을 '길어진 R9 나노'(super long nano) 로 비유한 바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R9 나노는 플라워형 쿨링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블로워팬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아래 사진을 참조하자. 기판이 길어졌으니 차라리 'R9 나노 스타일'의 쿨링팬을 듀얼팬으로 장착한 모양이 더 그럴싸하지 않겠는가.
애초 우리에게는 '제미니가 R9 390 시리즈와 비슷한 쿨러를 사용했다' 보다 훨씬 쉽고 안전한 선택지가 존재했다. 로이 테일러의 트위터에 올려진 '티키'에 R9 390 그 자체가 탑재되었다는 것이다. 마침 현존하는 두 개의 주요한 PC 기반 VR 표준 - 오큘러스 리프트와 HTC Vive 모두 권장 사양으로 엔비디아의 지포스 GTX 970을 거론하고 있으며, AMD의 이에 대한 카운터파트는 정확히 R9 390 시리즈에 해당한다. 실존하며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R9 390X를 상상하는 대신 굳이 에둘러 '제미니'를 떠올린 것은 앞서 언급한 모든 논리적 비약과 연상에서의 편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모든 정황을 고려하여,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으로 글을 맺으려 한다. "여러분이 트위터로 본 것은 진짜 제미니가 아닐 수 있다. 팔콘 노스웨스트가 만든 VR 디벨로퍼 박스, '티키'는 반드시 단일 구성일 필요가 없으며, 그 중에는 라데온 R9 390 시리즈를 탑재한 모델이 존재할 것이다. R9 390을 닮은 제미니의 사진이랍시고 돌아다니는 사진은 높은 확률로 R9 390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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